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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의 문화유산으로⑨류림 선생 묘 - 향토문화재 제29호

기사입력 2012-05-15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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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림 선생 묘(柳琳 先生 墓)는 행신동 번데뫼 마을에 위치하며 배(配) 증정경부인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묘와 합장되어 있습니다. 묘 앞에는 높이 127㎝, 너비 52㎝, 두께 22㎝의 묘비가 있습니다.

 

▲ 류림 선생의 묘

 

묘소 아래 100m 지점에는 숙종 21년(1695) 8월에 건립된 신도비가 남아 있습니다. 신도비에는 옥개석이 갖추어져 있고, 비문은 남구만(南九萬)이 짓고 글씨는 아들 지발(之發)이 썼으며 전은 홍수주(洪受疇)가 하였습니다. 높이 240㎝, 너비 91㎝, 두께 34㎝입니다.

 

▲ 류림 선생의 묘
 

류림은 조선조 중기의 무신 인조 21년(1643)에 돌아갔습니다. 자는 여온(汝溫)이며 본관은 진주로 공조판서 진동(辰仝)의 손자입니다. 선조 36년(1603) 무과에 급제하여 충청도 병마절도사,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등을 지냈습니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는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성을 굳게 수비하여 침입한 청군의 공격을 무사히 넘겼습니다. 강화에서 남하하는 적을 크게 무찔러 전공을 세웠습니다. 청국과의 화의가 성립된 후 다시 평안도 병마절도사에 부임하였으며 청나라의 요청으로 명나라 군대를 격퇴하였습니다. 그 전공으로 심양으로부터 초청장이 왔으나 이를 거절하여 오히려 백마성(白馬城)에 유배, 안치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인조 16년(1638) 풀려나와 이듬해 삼도수군통제사로 승진되었습니다. 인조 19년(1641) 청국이 명나라를 토벌할 때 또다시 그들의 요처에 따라 영병장(領兵將)으로 출정했으나 몸이 불편하다는 구실로 참전하지 않았습니다. 돌아간 후에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장(忠壯)입니다.

 

▲ 류림 선생의 묘

 

▲ 류림 선생의 묘

 

▲ 류림 선생의 묘

심준용 시민기자 (gyinews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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