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의 선생 묘(李愼儀 先生 墓)는 고양시청에서 화전방향으로 이어진 69번 지방도로 도내동 서촌마을 입구인 도래울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묘는 정부인 경주 이씨(貞夫人 慶州 李氏)의 묘와 쌍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묘소에는 묘비, 상석, 향로석과 망주석, 문인석 각 1쌍이 있는데 대부분 최근 새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묘 좌측의 대리석 묘비는 영조 25년(1749) 7월에 건립한 것으로 높이 250㎝, 너비 60㎝, 두께 20㎝의 규모이며 비좌와 팔작지붕의 옥개를 갖추고 있습니다.
신도비는 이신의 선생 묘 앞에 위치해 있습니다. 신도비는 4면 각자(刻字)로 앞면 상당에 ‘증이조판서 문정공 석탄 이선생 신도비명(贈吏曹判書文貞公石石灘李先生神道碑銘)’이라 전자되어 있습니다. 비신을 꽂은 대좌는 비교적 보존 상태가 좋으며 비신은 흔히 볼 수 없는 애석으로 되어 있으며 전후좌우 4면에 비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비문은 작은 세서로 세겨져 있으나 비교적 뚜렷이 남아 있어 판독에는 큰 어려움이 없을 정도입니다. 비의 앞면에는 증 이조판서문, 좌측에는 정공석, 후면에는 탄 이선생신도, 우측에는 비명이라 새겨져 있습니다.
이신의(李愼儀)는 1551년(명종 6)에 태어나서 1627년(인조 5)에 사망한 조선 중기의 문신입니다.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경칙(景則), 호는 석탄(石灘)입니다. 형조판서 원손(元孫)의 아들이기도 합니다. 민순(閔純)의 문인이며 김장생(金長生)과도 친교가 있었습니다. 일찍이 어버이를 여의고 형으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1582년(선조 15) 학행으로 천거되어 예빈시봉사가 되었고, 이어 참봉·종묘서봉사 등을 지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군 300명을 거느리고 적과 싸워 공을 세웠는데, 행주대첩시에도 전력을 지원했다고 전합니다. 공로를 인정받아 사옹원직장에 올랐으며, 사재감주부·공조좌랑·고부군수 등을 지냈습니다.
1596년 이몽학(李夢鶴)의 난 때에는 직산현감으로 천안군수 정호인(鄭好仁)과 함께 8,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병사(兵使)에게 달려갔습니다.
1604년 괴산군수를 거쳐 광주목사(廣州牧使)·남원부사·홍주목사·해주목사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1617년(광해군 9) 광해군의 폭정으로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하려는 데 대하여 이항복(李恒福)·정홍익(鄭弘翼)·김덕함(金德諴) 등이 극간하여 유배되자 그도 분연히 항소를 올렸다가 이듬해 회령으로 유배, 위리안치되었습니다. 그해 가을 북로(北虜)의 경보(警報)가 있어 변경일대가 불안하여지자 흥양으로 유배지를 옮겼습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형조참의·광주목사(光州牧使)를 역임하고, 1626년 판결사를 거쳐 이듬해 형조참판에 올랐습니다. 이해 정묘호란으로 왕을 호종하여 강화로 가던 도중 발병하여 인천에 체류하다가 수원 마정리에서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고양의 문봉서원(文峰書院)과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에 제향되었습니다.
저서로 《석탄집》이 있습니다. 시호는 문정(文貞)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