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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의 문화유산으로고양향교, 경기도 문화재자료 69호

기사입력 2012-05-17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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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국립교육기관인 고양향교(高陽鄕校)는 1428년 현재의 서삼릉이 있는 곳에 처음 건립되었습니다. 1537년에는 중종의 계비인 장경왕후가 승하하면서 그곳이 장지로 결정되면서 대자동의 고읍마을로 이전되었습니다. 하지만 60여년 후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모두 소실되었고 곧바로 재건되었다가 1625년에 비로소 현위치에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 고양향교

 

그러나 6·25 전쟁때 소실되어 1980년대 이후 몇 차례 중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향교의 정면에는 홍살문이 있고 그 뒤에 외삼문, 그 안쪽에 정면 4간, 측면 2간의 명륜당이 위치해 있습니다. 그 좌우에 동재, 서재가 있으며 정면 가장 중앙되는 곳에 공자(孔子)와 그의 제자들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이 있으며 동·서무에는 우리나라 선현(先賢) 등 총 20위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대성전은 장대석 바른층 쌓기 기단 위에 원형의 정평주추가 있으며 기둥은 나무로 만든 둥근기둥입니다. 연릉 천장에는 익공이 있으며 맞배지붕 외에 방풍판이 있습니다.

 

단청은 고풍스럽게 칠해져 있으며 규모는 정면 3간, 측면 2간으로 면적은 58.5m²입니다. 대성전 좌측에는 전사청 건물이 있습니다. 향교에서는 매년 음력 8월 27일 공자의 탄신일을 맞이하여 석전대제(釋奠大祭)를 봉행하고 있습니다.

 

▲ 고양향교

 

향교는 서울의 사학(四學)과 마찬가지로 성균관(成均館)의 하급 관학(官學)이었습니다. 문묘(文廟)·명륜당(明倫堂), 중국·조선의 선철(先哲)·선현(先賢)을 제사하는 동무(東廡)·서무, 양반의 기숙사인 동재(東齋)와 평민들의 서재가 설치되었습니다. 향교는 각 지방관청의 관할하에 두어 부(府)·대도호부(大都護府)·목(牧)에는 각 90명, 도호부에는 70명, 군(郡)에는 50명, 현(縣)에는 30명의 학생을 수용하도록 하고, 종6품의 교수와 정9품의 훈도(訓導)를 두도록 《경국대전》에 규정하였습니다.

 

향교에는 정부에서 5∼7결(結)의 학전(學田)을 지급하여 그 수세(收稅)로써 비용에 충당하도록 하고, 향교의 흥함과 쇠함에 따라 수령(守令)의 인사에 반영하였으며, 수령은 매월 교육현황을 관찰사에 보고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향교는 임진·병자의 양란과 서원(書院)의 발흥으로 부진하여 효종 때에는 지방 유생으로서 향교의 향교안(鄕校案)에 이름이 오르지 않은 자는 과거의 응시를 허락하지 않는 등의 부흥책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 고양향교

 

1894년(고종 31) 이후 과거제도가 폐지되면서 향교는 이름만 남아 문묘를 향사(享祀)할 따름이어서 1900년에는 향교재산관리규정을 정하여 그 재산을 부윤·군수 등이 관장토록 하였습니다. 1918년 조사된 바로는 당시 향교의 총수는 335, 소관토지는 48만 평이었으며, 그 재산은 문묘의 유지와 사회교화사업의 시설에 충당하였고 합니다.

 

 

고양향교 배향인물

 

 

대성전=정위(正位)=공자(孔子)

 

서향(西享)=안자(顔子). 자사(子思)

 

동향(東享)=증자(曾子). 맹자(孟子)

 

동무=홍유후 설총(弘儒侯 薛聰), 낙국공 정이(洛國公 程滯), 문성공 안유(文成公 安裕) , 문경공 김굉필(文敬公 金宏弼), 문정공 조광조(文正公 趙光祖), 문순공 이황(文純公 李滉), 문성공 이이(文成公 李珥), 문원공 김장생(文元公 金長生), 문경공 김집(文敬公 金集), 문정공 송준길(文正公 宋浚吉)

 

서무=문창후 최치원(文昌侯 崔致遠), 휘국공 주희(徽國公 朱熹), 문충공 정몽주(文忠公 鄭夢周), 문헌공 정여창(文獻公 鄭汝昌), 문원공 이언적, (文元公 李彦迪), 문정공 김인후(文正公 金麟厚), 문간공 성혼(文簡公 成渾), 문열공 조헌(文烈公 趙憲), 문정공 송시열(文正公 宋時烈), 문순공 박세채(文純公 朴世采) 

심준용 시민기자 (gyinews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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