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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일 2022-05-27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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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의 문화유산으로조선의 주요 객관, 벽제관지, 사적 144호

기사입력 2012-05-22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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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양구 고양동 읍내마을에 위치한 『벽제관지(碧蹄館址)』는 고양향교, 향교골 은행나무와 함께 이 지역의 오랜 역사를 보여주는 문화유산입니다. 지명을 고양동(高)이라 하는 것도 1625년부터 1914년 까지 289년간 고양군청과 벽제관과 같은 중요한 공공기관이 있어 붙여진 것이지요.

 

고양동은 파주, 양주, 고양지역이 만나는 곳으로 옛 부터 교통의 중심지였습니다.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과 조선의 수도인 한양을 연결하는 곳이었고 중국의 사신과 우리나라의 고위관리 등이 자주 지나는 경의대로(연행로, 의주로, 관서대로)의 중심 건물이 벽제관이었습니다.

 

▲ 벽제관지

 

벽제관은 현재의 벽제관지에서 서쪽으로 3km 가량 떨어진 웃 고골(고읍)에 지어졌습니다. 이후 임진왜란 등으로 훼손되고, 당시 고양군청(高郡廳)이 1625년 현재의 고양동으로 옮기면서 벽제관도 고양향교와 함께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고양의 벽제관(碧蹄館)은 왕조실록과 같은 기록을 보면 세종 원년(1419)에 중국 사신을 효령대군, 영의정 유정현 등이 영접했다는 내용을 시작으로 수 십 차례 기록에 보이는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 벽제관지

 

그러나 벽제관(碧蹄館)은 사신영접의 기능 이외에도 고양군수가 전패(殿牌)와 궐패(闕牌)를 모시고 임금께 예를 올리는 장소였으며 외부에서 온 관리나 손님이 머물렀던 공용의 숙박(宿泊) 장소이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지방 소송에 대하여 재판하는 장소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벽제관(碧蹄館)은 인근에 조선시대 왕릉이 있어 이곳을 임시 궁궐인 행궁(行宮)으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전해지네요.

 

▲ 벽제관

 

1900년대 초반에 촬영한 사진에는 이곳 벽제관(碧蹄館)의 옛 모습이 잘 남아 있습니다. 우선 입구에는 삼문(三門)이 있는데 여기에 벽제관(碧蹄館)이란 현판이 쓰여 있고 중문(中門)에 태극무늬가 그려져 있습니다. 일설에는 명필 한호(韓濩) 한석봉의 현판 글씨라 전해집니다. 삼문(三門)안쪽 정청 건물은 현재 터만 남아 있는데 전돌과 마루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정청 좌우에는 방이 딸린 동익헌(東翼軒)과 좌익헌(左翼軒)이 있었습니다. 옛 기록에는 행랑, 중대랑, 즉청방, 익랑, 하마대 등이 보여 지금보다 훨씬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벽제관지의 북쪽에 있는 야트막한 언덕에 작은 정자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구요.

 

▲ 벽제관

 

한편 벽제관지는 6.25전쟁을 겪으면서 폭격으로 인해서 모두 무너졌다고 합니다. 주변에 있는 집들도 모두

 

벽제관지는 1998년 경기도 박물관과 연세대학교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사진과 유사한 건축물 발굴결과가 나왔고 당시 명문기와, 도자기, 동전, 못, 등 187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특히 삼문 동쪽 계단에서 『벽제(碧蹄)』라 쓰여진 석물이 발견되어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지요. 벽제관의 원래 현판은 고양시청에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심준용 시민기자 (gyinews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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